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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신앙서적

<슬로우 영성> - 존 마크 코머

by 어린프린스 2022.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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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영성 + 미니수첩 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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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슬로우 영성
분야/장르 : 종교/기독교
지은이/옮긴이 : 존 마크 코머/정성묵
출판사 : 두란노서원
출판연도 : 2021

슬로우 영성 - 존 마크 코머

 

목차
 
존 오트버그 서문. 자유는 값없이 찾아오지 않는다

프롤로그. '바쁨'이라는 유행병을 씻어 낸 환자의 고백록

Part 1. '속도감 있는 삶'에 중독되다
― 덧없는 것에 정신을 파느라 영적으로 무뎌진 시대

1. 만성적 바쁨, 이 시대 영성의 가장 거대한 적
2. 우리는 언제부터 시간에 쪼들리게 되었을까?
3. 조급증, '소중한 모든 것'을 죽이는 폭력적 맹수

Part 2. 예수의 사람들의 시간 사용법
― 누구보다 하루가 꽉 찼던 그분,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4. 시간 기근의 해법은 '더 많은 시간'이 아니다
5. 예수와 '쉬운 멍에'를 메고, 예수의 속도로
6. 사랑과 기쁨과 평안이 깃들 '틈'과 '룰'이 필요하다

중간 휴식: 잠깐, '영적 훈련'이란 무엇인가

Part 3. 이 시대를 위한 전인적 '슬로우 영성' 훈련
― 인생의 무게를 지는 전혀 새로운 방식

7. 침묵과 고독 훈련 /
소음 전쟁터, 날마다 하나님을 가장 크게 듣는 연습
8. 안식일 훈련 /
일을 멈추고, 욕구를 멈추고, 걱정을 멈추는 연습
9. 단순함 훈련 /
영혼을 갉아먹는 물질주의와 소유욕의 굴레를 끊는 연습
10. 늦추기 훈련 /
'생각하는 속도'와 '몸을 움직이는 속도'를 같이 늦추는 연습

에필로그. 최종 목적은 '우리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감사의 말


프롤로그. '바쁨'이라는 유행병을 씻어 낸 환자의 고백록 

 한국 태생의 독일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 The Burnout Society>라는 책을 대다수 서구인들에 관한 날카로운 통찰로 마무리한다. "그들은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다."<p24>

 

Part 3. 이 시대를 위한 전인적 '슬로우 영성' 훈련
― 인생의 무게를 지는 전혀 새로운 방식

8. 안식일 훈련 /
일을 멈추고, 욕구를 멈추고, 걱정을 멈추는 연습\

세계 부의 피라미드

<p186>
9. 단순함 훈련 /
영혼을 갉아먹는 물질주의와 소유욕의 굴레를 끊는 연습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눅 12:3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나하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 6:25, 33)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막 4:19)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
<p196-198>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돈에 관한 예수님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실상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당신이 늘 원하던 삶을 지금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복된 소식을 믿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수입에서 지위와 건강, 관계적 상태까지 그 무엇도 우리가 "참된 생명"을 누리는 것을 막을 수 없다(딤전 6:19). 그런데 돈에 관한 예수님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다른' 복음을 믿는 것일 수 있다. 좋은 삶과 그것을 얻는 방법에 관해 다른 비전을 품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을 '물질의 복음'이라고 부르자. 이 복음은 예수님과 정반대 주장이다. 간단히 말해, 많이 가질수록 행복해진다는 주장이다. 새 옷이나 신발, 골프 클럽, 희귀한 모양의 선인장 화분을 사면 자연스럽게 더 행복해질 것이다. 자동차를 새 모델로 바꾸라, 로고에 불이 들어오는 최신 모델로, 더 크고 좋은 집을 사서 최고급 가구, 이왕이면 스웨덴이나 이탈리아 제품으로 채워 넣으라. 조직의 사다리 위로 자꾸자꾸 올라가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진과 연봉 인상과 보너스를 쟁취하라. 그렇게 하면 더 행복해질 것이다.
 이는 다 아는 사실이다. 행복은 저 앞에 있다. 결제 버튼 클릭 한 번, 옷 한 벌, 전자기기 한 대, 집 한 채면 행복이 찾아올 것이다. 물론 아직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하지만 거의 다 왔다. 코앞까지 왔다. 행복이 분명히 느껴진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사실을 말해 보면, 우리 코앞에서 대롱거리는 당근에는 막대기가 달려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서구 사회에서 물질주의가 주된 의미체계로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그는 무신론이 아니라 쇼핑이 문화적 기독교를 대체했다고 주장했다. 이제 우리는 소비를 하면서 삶의 의미를 얻는다. 심지어 우리가 사는(혹은 파는) 것들에서 정체성을 얻는다. 많은 사람이 입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내가 사는 것이 곧 나다"라고 믿는다. 즉 그들은 자신이 입는 옷,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모는 자동차, 사는 동네, 사용하는 전자기기에서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들에게 물건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 자체다.
 이제 쇼핑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레저 활동이다. 쇼핑은 종교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아마존닷컴은 새로운 신전이다. 신용카드가 새로운 제단이다. 더블클릭이 새로운 전례다. 라이프스타일 블로거들이 새로운 제사장들이다. 돈이 새로운 신이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유일한 신이 맘몬(돈의 신)인 데는 이유가 있다(마 6:24). 그것은 맘몬이 그만큼 지독히 나쁜 신이요 나쁜 종교이기 때문이다.<p199-200>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다. "문명은 불필요한 필수품들의 무한 곱하기다." 역시 트웨인 답게 정확한 지적이다. 서구의 부와 기술이 계속해서 증가하는 상황에서 많은 심리학자들이 행복은 같은 속도로 증가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 연구에 따르면 국가의 부가 증가할수록 행복은 오히려 줄어든다. 최소한 늘지는 않는다. 인간의 정신은 새로운 상황에 금방 적응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전화기, 매일 챙겨 먹는 종합비타민, 전기, 수돗물 등 우리가 '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들은 최근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고, 옛날 사람들은 이런 것 없이도 행복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것을 갖고도 이제 그리 큰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뒷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볼일을 보던 시대로 돌아가야 할까? 수돗물을 포기해야 할까? 신용카드를 잘라 버려야 할까? 그렇지 않다. 그래 봐야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첫째, 우리가 '더 많이'를 외치는 끝없는 인간 욕구 때문에 물질 소유에 한계를 두지 않고, 둘째, 실상은 필요한 것이 매우 적은데도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신약 기자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의 숫자를 겨우 두 개로 압축했다. 바로, 음식과 옷.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p206-208>


 돈과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세상이 실제로 돌아가는 방식에 관한 진술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예수님은 "신발을 세 켤레 이상 사지 말라"라고 명령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단지 실질적인 삶의 원리를 진술하셨을 뿐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옷장이나 차고나 계좌 안에 있지 않다. 그런 것들이 "넉넉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보이는가? 예수님은 사실을 가르치고 계신다. 우리가 그 말씀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는 다른 문제다. 돈과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약 25퍼센트가 돈과 재물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그중에서 돈과 재물을 좋게 보는 말씀은 하나도 없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길이 실제로 더 좋고 더 자유로운 삶의 길이다.

* 재물이 많으면 스트레스도 많아진다면? 근무 시간, 빚, 원치는 않는 직장에서의 근무 연수, 필요하지도 않은 쓰레기를 청소하고 유지하고 수리하고 갖고 놀고 정리하고 개선하기 위해 허비하는 시간만 늘어난다면?

* 재물이 많아질수록 가장 중요한 것은 줄어든다면? 즉 시간이 줄어든다면? 재정적인 자유가 줄어든다면? 예수님이 진정한 기쁨의 원천이라고 하신 베풂이 줄어든다면? 쇼핑몰 주차장을 뛰어다니느라 평안이 줄어든다면? 진정한 삶에 집중하는 능력이 줄어든다면? 창의력이 줄어든다면? 관계의 질이 떨어진다면? 여유가 줄어든다면? 기도가 줄어든다면? 내가 정말로 갈망하는 것들이 줄어든다면?<p213-216>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이번에도 역시 "하지 말라"가 아니라 "하지 못한다"다. 예수님께 이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것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의 자유로운 길로 가면서 우리 사회에 흔한 과소비에 빠져들 수는 없다. 이 둘은 상호 배타적이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p218-219>


구매하기 전에, 이것을 사면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거나 지구 환경에 해를 끼치는 것인지를 따져 보라
 과소비의 희생양은 지구만이 아니다. 몇 년 전 글로벌화의 어두운 면을 알고서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내 집과 삶에서 사용하는 정말 많은 물건이 노골적인 인신매매와 아동 노동 착취는 아니더라도 불의한 방식으로 생산된 것인 줄 전에는 전혀 몰랐다.
 오늘날에는 미국인들이 입는 의류의 겨우 2퍼센트만 국내에서 생산되며, 미국인들은 연간 예산의 겨우 4퍼센트 정도만 의류에 소비한다. 미국에서는 어떻게 이토록 값싼 가격으로 의류를 판매하는 것일까? 다국적 기업들이 의류를 베트남이나 방글라데시 같은 곳에서 생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곳들에서는 정부 부패가 만연해 있다. 관리들은 노동 착취를 멈추기 위한 노력을 거의 혹은 전혀 하지 않는다. 최저임금이나 의료보험, 조합 같은 것들은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노동자들은 푹푹 찌는 공장에서 일주일에 6일 또는 일주일 내내 일한다. 대부분은 보호 장비도 없는 위험천만한 환경에서 목숨을 내놓고 일한다. ※ The True Cost
 '수많은' 사람이 이렇게 일하며 산다. 세계 인구 여섯 명 가운데 한 명은 의류 산업에서 일한다. 15억이 조금 못 되는 수치다. 이 노동자들의 약 80퍼센트는 여성들이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생활이 가능할 만큼의 임금을 받는 사람들은 2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우리가 값싼 물건을 사면서 '도둑질'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그렇다. 도둑질. 게다가 우리는 우리가 자주 악인 취급을 하는 슈퍼리치들에게서 훔치는 로빈 후드가 아니라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고 발버둥치며 일하는 미얀마의 싱글맘에게서 훔치고 있다.
 SNS에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2,800만 명의 노예가 존재하며 이 상황을 끝내야 한다는 글을 올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중국 시골에서 만들어진 스마트폰으로 셀피를 찍기 위해 입는 옷들의 대부분은 그런 상황을 끝내기는커녕 오히려 유발하고 있다.<p228-229>


만족하는 삶, 행복한 삶
 단순함이 현대 세상의 바쁨을 해결해 주는 '절대적인 답'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하나의' 답이다. 심지어 쉬운 답이다. 필요하지 않은 잡동사니를 치우라. 하지만 이것은 '값싼' 답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가가 따른다.
 달라스 윌라드가 지적했듯이 제자도의 대가는 크다. 하지만 제자가 되지 않은 대가는 훨씬 더 크다. 그렇다. 예수님을 따라 단순하게 살면 대가가 따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훨씬 더 큰 대가가 따른다. 돈과 시간뿐 아니라 정의롭고 양심적으로 깨끗한 삶, 기도 시간, 바쁘지 않은 영혼, 무엇보다도 "참된 생명"을 잃는다.
 최근 빌립보서에 기록된 바울의 말을 줄곧 생각해 왔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그런데 이 구절을 전후 관계를 무시하고 해석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그들은 헌금을 모으거나 승진하거나 암을 이기거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이 구절을 사용한다. 뭐, 다 좋다. 하지만 바울이 무슨 배경에서 이 고백을 했는지 아는가?
 바로, 만족.
 바로 직전 구절은 다음과 같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 철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

 전후 맥락을 고려할 때 바울은 우리 삶의 골리앗을 극복하는 법을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에드워드 버네이스 전이나 후나 인간 영혼의 최대 적 가운데 하나인 불만족에 관해 말한 것이다. 항상 '더 많이'을 원하는 것, 물건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더 많이'를 원하는 것, 졸업, 결혼, 자녀, 더 좋은 직장, 은퇴까지 다음번 것을 얻어야 만족할 것만 같은 느낌. 하지만 항상 뭔가가 부족한 느낌.
 우리는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가 말한 "멈출 수 없는 불만족"을 안고 살아간다. 전도서 기자는 이를 두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만족은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욕구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만족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충족되지 않는 욕구들을 갖고 살아간다. 이생에서 우리의 교향곡은 끝까지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지속적인 관계에 우리의 자원을 투자할 때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가나하든 부요하든, 미혼이든 기혼이든, 불임이든 모든 자녀가 출가할 날만 세고 있든, 꿈에 그리는 직장에서 일하든 최저 임금으로 일하든 상관없이 풍성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 지금 당신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당신은 하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다. 당신은 그분께 사랑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렇게 쉬운 멍에가 또 있을까?<p23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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