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미래를 산다.
코로나와 대선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코로나 여파로 세계 경제가 몰락했고, 백신패스로 인해 인간의 자유와 기본권에 대한 말이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무너진 경제를 살리고, 예전 같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를 희망하며
사람들은 다음 대통령 당선 주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생각은 저마다 달라서 특정 후보에 대한 칭찬과 비판을 하며
자기만의 후보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기준은 다양하겠으나 나는 크게 2가지로 본다.
첫 번째 후보의 기준은 현재 경제가 너무 좋지 않기 때문에 경제를 잘 살릴 수 있는 후보이다.
부동산 정책은 역대 최악이며, 코로나로 인해 자영업자들은 위기에 직면해 있다.
두 번째 후보의 기준은 인간의 자유와 기본권을 박탈한다고 생각하는 백신패스를 반대하는 후보이다.
백신패스는 당장은 국민의 안전과 생명권을 보장하는 것 같아 보이나 그 이면에는 악용될 소지가 있는 양면성이 있는 정책이다 보니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국민을 통제하는 목적으로 사용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백신의 효과 유무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다만, 우리는 사람들이 언제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행복의 경우는 지금 당장 이 순간이 너무 즐거워서 행복한 경우다. 지금 당장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거나, 재밌는 영화를 본다거나, 친구랑 술을 한잔한다거나, 놀러를 왔다거나 등과 같은 경우다. 이 경우의 행복은 일시적인 행복이다. 그러니까 일상으로 돌아오면 곧 사라질 행복인 것이다.
두 번째 행복의 경우는 지금 당장은 조금 힘들지라도 미래에 무언가 기대와 희망이 있고 믿는 구석이 있어서 행복한 경우다. 월화수목금은 힘들게 일하고 있지만 곧 다가올 주말을 생각하며 행복해하는 것, 전망이 좋은 주식에 투자를 하여서 몇 년 뒤에 부자가 돼 있을 상상에 행복해하는 것, 열심히 돈을 모아서 사업을 하거나 집을 사는 꿈을 꾸며 행복해하는 것, 이외에 모든 미래에 어떤 긍정적인 일을 기대하며 현재를 이겨내는 것. 이 경우의 행복은 미래지향적인 행복이다. 그 꿈을 이루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는 행복 즉, 기대, 바람, 소망, 희망 등의 단어로 쓰일 수 있겠다.
사형 선고를 앞둔 죄수나 죽음을 앞둔 사람이 죽기 전에 최고급 음식을 먹고, 재밌는 영화를 보고, 초호화 리조트에 놀러 간들 과연 행복할까. 미소는 지을 수 있겠으나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곧 죽는데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반면 지금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 기대가 있는 사람은 그 기대로 하루를 살아가며 소확행으로 일상을 보낸다.
이처럼 우리는 미래를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를 살고 있지만 우리가 현재를 사는 원동력은 바로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절망하고 포기하거나 자살하는 이유는 내가 지금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미래에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을 때이다.
조선시대 때 노비들이 그랬다. 한번 백정은 영원한 백정이기 때문에 어떤 희망이 없이 그냥 매일 목숨을 연명하고 배를 채우기 위해 그저 살았다. 인간답게 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사회에서 그렇게 살게 놔두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어떠한 선택도 스스로 자유롭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목숨 마저도..
지금 당장 먹고 살기가 좀 힘들다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못 마신다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못 본다고, 쇼핑을 못 한다고, 리조트에 놀러를 못 간다고 불평불만한다. 그리고는 순간의 행복과 쾌락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백신패스에 순응한다. 순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말하면서..
혹자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백신패스에 순응해야 되는 게 아니냐고 하나, 실상 그들에게도 백신패스에 순응한 이유를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일상생활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전염병에 대한 경각심과 타인에 대한 안전보다, 본인의 일상생활을 못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것이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자유를 억압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는 언론에서 보도되는 것과는 다르게 현재 사람들이 오미크론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자, 백신패스를 반대하는 사람이나 순응하는 사람이나(찬성하는 사람이라고 쓰지 않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여러 가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정부지침에 따른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모두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고 그것을 빼앗기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다만 이 둘의 차이점이 있는데, 전자는 당장의 자유보다 미래에도 지속 가능한 자유를 빼앗기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백신패스를 반대하고, 후자는 미래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지금 당장 자유를 얻기 위해서 백신패스에 타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의 자유를 얻기 위해 타협한다면, 미래에는 영원히 자유를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때는 정말 일상에서의 희망이 사라질 것이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되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역사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무지의 결과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세계에서 인권과 자유가 억압받는 나라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게 된다면 아마 생각을 달리 할 것이라고 조금은 기대해 본다.
북한도 중국도 베네수엘라도 베트남도 라오스도 가보면 겉에서 봤을 때 국민들은 그냥저냥 잘 살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렇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다. 그러나 그런 체제하에서 그 나라 국민이 되어 직접 살아봐라. 당신이 지금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 숨 쉬듯이 자유로워서 자유롭다고 망각했던 일상이, 이 얼마나 당연한 것이 아니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잃은 자유를 되찾는 것은 기적이 일어나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희생과 대가가 따른다. 가만히 있으면 결국 모조리 빼앗길 것이다. 지금 방관하고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것이다. 지금 당장 나와 내 가족들만 괜찮으면 된다는 생각, 이런 생각들이 모이고 모여 나라를 망하게 한다. 우리는 남이지만 또한 공동체다. 공동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데 모르는척하면 본인은 언제까지 무사할 것 같은가. 자기가 속한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든 맞서고 싸워야 한다. 선조들이 수십 년 동안 힘들게 일궈놓은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 말이다. 힘들 수도 있고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인들이 넘치게 받은 것들을 생각해보라. 다 누구 덕분이었는가? 이제는 우리가 후손들에게 좋은 것을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국민이라면 그리고 양심이 있다면 그런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보고 싶다.
1. 장기적으로는 국고가 바닥나고 오히려 국가 부채만 더 쌓여서 우리의 노년과 우리 자녀들이 힘들 수도 있으나, 어쨌든 지금 당장 눈앞에 내가 먹고살기 바쁜 경제를 살려줄 것 같은 정부,
2. 조건부패스를 백신패스부터 점차 다양하게 적용해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누리던 것들을 어떤 조건을 수행하지 않으면 반강제로 못하게 막는 정부,
3. 경제는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으나, 백신패스는 계속 유지해서 결국 나의 인권과 신체적 자유를 가랑비에 옷 젖듯이 억압할 것 같은 정부,
4. 지금 당장의 경제는 살릴 수 있을지 잘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앞으로의 국민의 인권과 자유는 존중해주는 정부,
다시 물어본다.
당신은 현재만 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미래도 사는 사람입니까.
기억하길 바란다.
미래가 없으면 현재도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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